행정부에서 입법부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입법부 소속 공무원, 입법관료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

전직 입법관료들은 입법 과정에 대한 전문성과 국회 재직시절 이해관계자들과 맺은 인맥을 바탕으로 관련 공공영역과 민간영역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 입법고시 출신 전직 국회 상임위원회 수석전문위원들이 있다. 이들은 모피아(MOFIA=MoFE+Mafia)라 불리던 기획재정부 출신 인사들의 산하기관 재취업 못지 않게 숨어있는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가히 어셈피아(Assembly+Mafia)라고 부를 만하다. 조선비즈는 입법관료 전성시대를 연 전직 국회 상임위원회 수석전문위원들의 재취업 실태를 추적했다.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실은 상임위원장실과 상임위 소위원회 회의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실은 상임위원장실과 상임위 소위원회 회의실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 산자부 관료가 가던 대한상사중재원장, 3대 연속 산자위 전문위원 출신에게

모피아 또는 관피아의 시대가 가고 어셈피아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 있다. 대대로 산업통상자원부 출신 관료들이 맡았던 대한상사중재원의 3년 임기 원장직을 최근 3대(代) 연속으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옛 지식경제위원회) 수석전문위원 출신 인사들이 차지한 것이다.

최근 20년간 대한상사중재원장 취임년도와 전직
최근 20년간 대한상사중재원장 취임년도와 전직

대한상사중재원(이하 중재원)은 상사(商事) 분쟁에 대해 중재 판정을 내리는 준(準)사법기구다. 중재 판정은 분쟁 당사자들이 합의한 중재인들에 의해서 이뤄지지만 법적 구속력을 갖는데다 재판에 비해 신속하고 비밀 유지에 유리해 기업들이 선호한다.

중재원은 형식상 산업통상자원부에 등록된 민간 비영리법인이다. 그러나 매년 정부로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국내연락사무소 사무국 사업과 국제투자분쟁 모니터링센터 사업을 위탁받아 수행하고 정부 지원금(2015년 기준 11억원)도 받는다. 또 산자부 무역정책국장이 당연직 이사가 되는 등 사실상 산자부 산하기관이다. 최근에는 법무부가 중재법 개정안과 중재산업 진흥법 제정안을 추진하는 등 정부의 전폭적 지원도 받고 있다. 그래서 산자부 감사관실로부터 2007, 2010, 2015년에 걸쳐 감사도 받았다.

2009년까지 역대 중재원장 자리는 퇴직 산자부 관료들의 몫이었다. 박삼규(6대, 전 산자부 차관보, 전 공업진흥청장), 김종희(5대, 전 특허심판원장), 이순우(4대, 전 상공부 통상진흥국장) 전 원장은 행정고시 합격 이후 행정사무관부터 시작해 공직 생활 대부분을 산자부 또는 그 전신인 상공부에서 지냈다.

이같은 흐름이 바뀐 것은 2009년 도재문 7대 원장부터다. 도 전 원장은 입법고시 4회 출신으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수석전문위원과 국회 사무처 입법차장을 거친 정통 입법 관료다. 권대수 8대 원장은 입법고시 5회 출신으로 역시 국회 산자위 수석전문위원을 거쳤다. 2015년 5월 취임한 현 지성배 9대 원장도 입법고시 6회 출신이다. 지 원장도 국회 산자위 수석전문위원을 거쳤고, 2015년 1월 국회 사무차장 직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났다.

◆ 2015년 현재 수석전문위원 출신 공공기관 임원 7명…본인이 예산 심사한 기관行

공공기관 경영정보를 공시하는 알리오에 따르면 2015년 3월 현재 국회 수석전문위원 경력을 가진 공공기관 임원은 총 7명, 직책은 총 8개에 이른다. 이들이 재취업한 공공기관은 대부분 이들이 수석전문위원으로 재직 당시 다뤘던 법안 또는 예산과 직접 관계된 기관들이다.

2015년 3월 현재 국회 수석전문위원 출신 공공기관 임원
2015년 3월 현재 국회 수석전문위원 출신 공공기관 임원

그러나 입법관료들이 다루던 법안, 예산과 직접 관련된 직책에 재취업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특히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은 행정부 차관보급 별정직 공무원에 불과하지만, 20명 미만의 극소수 인사만 참석하는 국회 상임위 소위원회에서 법안과 예산을 놓고 국회의원 및 장차관을 사실상 리드하면서 회의를 끌어가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의원들이 상임위 소위원회에서 예산안과 법안을 심사하기 위한 기초자료도 수석전문위원이 작성한다.

◆ 전문가 “어셈피아 관행, 입법부 본연의 기능·권위 해쳐”

전문가들은 ‘어셈피아’들이 행정부를 견제와 균형(check & balance)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입법부 본연의 역할과 권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또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정부는 민·관 유착을 끊겠다며 퇴직 고위 공무원의 재취업 기준을 대폭 높였는데, 정작 그 법을 만든 국회는 무풍지대(無風地帶)로 남아있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용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수석전문위원들은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에 법적·정책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는데 퇴직 후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던 상임위 산하기관 등에 재취업하는 것은 수석전문위원 본연의 임무와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반부패정책학회 회장이기도 한 김 교수는 “국회가 수석전문위원을 두는 이유는 입법부의 기능 강화 목적은 물론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하고 감시하라는 것”이라면서 “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전문성과 권한을 활용해 추후 관련 산하기관 등에 재취업한다면, 국회가 힘 있는 이들의 ‘입법 로비창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세월호 사태를 겪고 모든 분야가 환골탈태 했는데, 국회만 그대로”라고 꼬집기도 했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어셈피아’들이 삼권분립의 균형을 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어셈피아 관행은 또 다른 낙하산”이라면서 “지금도 국회 수석전문위원들이 정부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쓴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들이 국회에서 다시 행정기관으로 간다는 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를 엄청나게 위협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은 상임위원장 바로 옆에서 위원장을 보좌한다.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은 상임위원장 바로 옆에서 위원장을 보좌한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사실 수석전문위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회 보좌관, 국회 사무처 직원 등 입법부 전체의 문제”라면서 “이런 관행이 고착화되면 국회 본연의 업법활동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음성적 로비의 장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안 처장은 “이를 감시하고 견제할 분명한 법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른 의견도 있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수석전문위원들을 관피아와 같은 레벨에서 볼 수 없다”며 “전문성이 부족한 국회의원들이 입법 과정에서 이들의 말에 좌우될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관피아처럼 중요한 의사결정을 직접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재취업까지 문제 삼는 것은 헌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권대수 전 대한상사중재원장도 “중재는 공정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며 “국회는 행정부에 대한 감독과 비판 기능을 하니까 조금 독립된 관점에서 중재원을 끌어갈 수 있지 않나 해서 (국회 출신 원장이) 오히려 좋은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공기관장은 정부 관료들이 많이 왔었는데 중재원이 정부와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은 외국기업과의 분쟁시 중재 공정성에 대해 시비를 걸 수 있다”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정부 이외에 정부를 감시하는 입법부나 사법부 출신들이 오는 게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