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등록한 로비스트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미국, 캐나다와 달리 한국에서는 로비스트가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 대신 대기업의 ‘대관(對官)’ 요원이나 대형 로펌의 입법자문을 위한 고문들의 활동 형태로 암묵적인 로비가 이뤄진다.

이 암묵적인 로비스트 시장에서 최근 가장 인기있는 경력이 바로 전직 수석전문위원이다. 최근 이들은 개별적으로 사기업에 고용되지 않고 직접 조직을 만들어 입법 과정에 개입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로비 시장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한다.

◆ “국회 수석전문위원은 입법과정의 혈도(血道)를 아는 사람”

국회에서 오래 근무한 보좌진들은 전직 수석전문위원들에 대해 “(입법과정의) 혈도(血道)를 아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법안은 작은 표현의 차이만으로도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복잡한 여야간 협상과정을 다 알고 있는 입법관료들은 작은 노력으로도 고객이 원하는 바를 법안에 관철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이해관계 최첨단에 있는 집단 중 하나인 로펌도 입법관료들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추세다. 김앤장은 임인규, 구희권 전 국회 사무차장을 2011년과 2015년에 각각 영입했다. 이들은 김앤장 고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회 입법조사처 자문위원, 국회 예산정책처 자문위원으로 선임돼 지금도 여전히 국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태평양은 2014년 이병길 전 국회 사무차장을 영입했고, 화우도 국회 산자위 수석전문위원(2012년 퇴직)을 지낸 권대수 전 대한상사중재원장을 올해 영입했다.

최근 한 대형 로펌에 입사한 전직 수석전문위원은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현재 취업한 회사가 다른 로펌과 달리 입법 컨설팅을 하는 부분이 없어서 국회에서 30년 근무한 경력을 감안해 나를 영입한 것”이라며 “지금 입법 자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국회 공무원 퇴직자 단체, 이익단체 입법과제 연구용역 수주

국회 공무원 퇴직자 단체가 입법 과정에 개입하는 사례도 있다. 국회 공무원 퇴직자 단체인 사단법인 한국의정연구회(이하 의정연구회)가 2013년 한국공인중개사협회의 공인중개사법 제정을 도운 것이 대표적이다.

이해광 공인중개사협회장은 2013년 1월 중개업자 등록정수(쿼터)제 및 수습(인턴)제 도입, 공인중개사를 위한 공인중개사법 제정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이 회장은 취임 직후인 같은 해 3월 국회 공무원 출신으로 의정연구회 회원인 A씨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하며 공약 실현을 위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공인중개사협회는 2013년 국회 공무원 출신이자 한국의정연구회 회원인 A사무총장을 영입한 뒤, 같은해 5월 9일을 시작으로 공인중개사법 제정 추진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공인중개사협회는 2013년 국회 공무원 출신이자 한국의정연구회 회원인 A사무총장을 영입한 뒤, 같은해 5월 9일을 시작으로 공인중개사법 제정 추진위원회 회의를 열었다.

공인중개사협회는 같은 해 5월 9일을 시작으로 A 사무총장 등이 위원으로 참여한 가운데 공인중개사법 제정 추진위원회를 열고 요구사항을 수렴하기 시작했고, 6월 26일 의정연구회를 연구용역 기관으로 공식 지정했다. 연구용역을 수주한 의정연구회는 이후 윤태영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책임연구원으로 지정해 공인중개사협회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공인중개사법 개정안과 부동산거래신고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마련했다.

의정연구회는 공인중개사협회와 함께 같은 해 8월 14일 공인중개사협회 회원 대상 연구용역 중간보고회, 같은 달 27일 공인중개사 제도 발전을 위한 공청회를 열고 연구용역 결과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와 한국의정연구회는 2013년 8월 27일 공인중개사 제도 발전을 위한 공청회를 공동으로 주관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주최자인 주승용 당시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외에도 새누리당 정우택, 강길부, 이학재 의원과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우윤근, 민홍철, 임내현 의원이 참석해 법안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높은 관심이 드러났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와 한국의정연구회는 2013년 8월 27일 공인중개사 제도 발전을 위한 공청회를 공동으로 주관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주최자인 주승용 당시 국회 국토교통위원장 외에도 새누리당 정우택, 강길부, 이학재 의원과 민주당(현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우윤근, 민홍철, 임내현 의원이 참석해 법안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높은 관심이 드러났다.

윤태영 교수가 8월 27일 발표한 공인중개사법 개정안에는 ▲법률 명칭 변경 ▲개설 등록한 ‘공인중개사’에 대한 용어 변경 ▲개설등록한 공인중개사 이외의 자에 의한 중개업 금지 ▲‘중개수수료’의 ‘보수’로의 용어 개정 ▲공인중개사 수습제도 도입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 관련 업무정지 처분에 대한 과태료 조정 방안 ▲공인중개사의 공익활동 및 취약계층의 지원근거 조항 신설 등이 포함됐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와 한국의정연구회는 2013년 8월 27일 공인중개사 제도 발전을 위한 공청회를 공동으로 주관했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와 한국의정연구회는 2013년 8월 27일 공인중개사 제도 발전을 위한 공청회를 공동으로 주관했다.

이 연구용역 결과는 2013년 10월 8일 주승용 당시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이 대표 발의하고, 국토위 법안심사소위 소속 의원 전원을 포함한 여야 의원 51명(민주당 29명, 새누리당 20명, 비교섭단체 2명)이 서명하는 형태의 법안으로 만들어져 상임위 심사과정을 거쳤고, 같은 해 12월 31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례적으로 신속한 처리였다.

이해광 공인중개사협회장은 법안 통과 직후 “지난 30여년간 중개업계 염원인 공인중개사법이 통과됐다”고 환영했다. 공인중개사협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향후 부동산 중개업계의 선진화의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 “사실상 로비스트 회사, 법공장에서 턴키 방식으로 법 만들어 주는 것” 비판도

이같은 의정연구회의 활동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제정구, 김부겸, 최원식 의원의 보좌관으로 국회에서 22년 동안 입법관료들을 지켜본 이진수 전 보좌관은 “사실상 유사 로비스트 회사를 세워서 영업행위를 하는 것”이라며 “어떤 법안이든 돈만 있으면 이익단체들이 의뢰하는 대로 다 해주는 일종의 법 공장을 만든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법을 만드는 일이 법안 성안 뿐 아니라 관료와 이해관계자 설득 등의 프로세스가 복잡하고 지난한데, 그런 것을 완전히 도맡아서 턴키 방식으로 다 해주는 것”이라며 “돈이 많은 이익집단의 특수이익에 보편이익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의정연구회 핵심관계자는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수의계약도 아니고 공모에 참여한 것을 로비라고 하면 곤란하다”며 “공인중개사협회 공모에 우리가 참여한 것이고, 협회 내부 심사를 거쳐서 선정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용역 금액은 3000만원 선이었고, 전액 연구원에게 집행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A 사무총장은 국회에 있었던 분이니까 알고 있었다”며 “다른 안부 전화를 하는 과정에서 (연구 용역을) 공모하는 것을 알았고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 의정연구회는

1984년 국회 퇴직공무원 동우회로 시작해 1988년 사단법인 국우회로 국회 사무처에 등록했다. 2006년 명칭을 국우회에서 한국의정연구회로 바꿨다. 2006년부터 의정논총이라는 학술지를 발행하고 있으며, 2010년부터 국고보조금 사업인 꿈나무회의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2015년부터는 지방의회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사업도 시작했다. 매년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1억원 규모의 연구용역사업도 위탁받아 집행한다.

의정연구회는 정관에 조직의 목적을 “입법지원업무의 경험이 풍부한 의회전문가로 구성된 단체로서 의회제도의 연구, 국회 입법보조업무의 향상발전, 회의 운영관련 교육, 회원 및 국회공무원의 후생복지 증진에 기여함과 동시에 회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부상조하여 유대를 공고히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퇴직했거나, 타기관으로 전출된 사람이 정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현직 공무원도 준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현재 대표는 건설교통위원회 수석전문위원 출신의 이승훈 회장이다. 주영진 전 국회예산처장, 강장석 전 통외통위 수석전문위원, 류삼헌 전 산자위 수석전문위원 등 20여명의 퇴직 공무원들이 부회장을 맡고 있고, 구희권 전 사무차장, 도재문 전 입법차장, 권대수 전 산자위 수석전문위원, 김호성 전 지경위 수석전문위원, 노재석 전 교과위 수석전문위원 등 수십명의 전직 수석전문위원들이 자문위원이다.

현재 국회도서관 건물 409호를 사무처로부터 무상 임대 받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국회사무처 감사담당관실, 국회윤리특별위원회자문위원회 사무실과 마주보는 위치다.

한국의정연구회는 현재 국회도서관 409호를 사무처로부터 무상 임대 받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국회사무처 감사담당관실, 국회윤리특별위원회자문위원회 사무실과 마주보는 위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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